한남동성당 김형찬 토마스 주임신부님과 이베니타 원장 수녀님과 봉사자 형제 자매님들이 솔뫼성지순례를 다녀 왔습니다.
솔뫼성지 소개 1. 솔뫼 성지 略史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114번지인 "솔뫼"는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 내포(內浦)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내포는 남으로는 광천의 오서산을, 서북으로는 덕산의 가야산을, 서로는 큰 바다를, 북으로는 경기도 해읍(海邑)과 아산만을 경계로 하면서 서해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평야지대이다. 내포의 한복판에는 삽교천이 흐르고 있다. 삽교천은 선사시대부터 바다를 통하여 건네지는 문화를 내륙으로 전하는 ’문’의 구실을 하였다. 삽교천에 인접해 있는 "솔뫼"는 일찍부터 외국 문물을 접하였다. 따라서 이곳에 복음이 전하여진 것은 육로를 통하여 복음이 전하여진 이승훈(1784년) 이전으로 미루어지며, 그런 까닭으로 한국 천주교 초창기에 이곳 내포 출신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전국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고 순교를 하는 굳은 신앙의 모범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소나무 숲이 청청하다고 붙여진 솔뫼는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지이며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을 따라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사셨던 곳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순교하신지 100년이 되던 1946년에 합덕(현재 구합덕) 본당 백 문필 비리버 신부님께서 현재 복자 김대건 신부의 기념비가 서 있는 땅 100평을 임대한 것이 솔뫼 성역화의 시작이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25세의 한창 젊은 나이로 새남터에서 순교한 1846년 9월16일로부터 꼭 백년이 지났을 때인 1946년에 합덕(현재 구합덕) 본당 백 문필 비리버 신부님께서 현재 복자 김대건 신부의 기념비가 서 있는 땅 100평을 임대한 것이 솔뫼 성역화의 시작이었습니다. 1976년부터 집터와 소나무가 우거진 뒷동산을 메입하여 본격적인 성역화를 시작하였습니다. 1977년에 김대건 신부님의 동상과 성모님의 모상으로 기념탑을 세우고 순례를 통해서 기도와 회개의 생활로 김대건 신부님의 신앙을 본받으며 교육할 수 있는 피정의 집이 1983년에 완공되었습니다. 2. 솔뫼 성지의 지리와 유래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 자리한 "솔뫼"는 소나무 숲으로 덮인 산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 내포(內浦)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내포는 남으로는 광천의 오서산을, 서북으로는 덕산의 가야산을, 서로는 큰 바다를, 북으로는 경기도 해읍(海邑)과 아산만을 경계로 하면서 서해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평야지대이다. 내포의 한복판에는 삽교천이 흐르고 있다. 삽교천은 선사시대부터 바다를 통하여 건네지는 문화를 내륙으로 전하는 ’문’의 구실을 하였다. 삽교천에 인접해 있는 "솔뫼"는 일찍부터 외국 문물을 접하였다. 그래서 이곳에 복음이 전하여진 것은 육로를 통하여 복음이 전하여진 이승훈(1784년) 이전으로 미루어지며, 또한 한국 천주교 초창기에 이곳 내포 출신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전국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고 순교를 하는 굳은 신앙의 모범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솔뫼 출생의 대표적 순교자는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지 100년이 되던 1946년에 합덕 본당(현재 구합덕 본당) 백 필립보(文弼, 프) 신부가 현재 솔뫼에 복자 김대건 신부의 기념비가 서 있는 땅 100평을 임대한 것이 솔뫼 성역화의 시작이었다. 1977년에 성모님을 상징하는 상을 배경으로 하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과 기념탑을 세우고, 1983년에는 성지 순례를 통해서 기도와 회개의 생활로 김대건 신부의 신앙을 본받으며 교육할 수 있는 피정의 집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정작 솔뫼의 대표적 인물인 김대건 신부의 생가는 터만 고증되었을 뿐 파괴된 이래(1821년) 현재까지도 복원되지 못한 실정이다. 3. 김대건 신부의 가문 이곳 솔뫼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가문이 정착한 것은 8대 선조(守完, 1643-1725) 때 부터이다. 김 신부 가문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큰할아버지 종현(淙鉉, 1764-1806)과 할아버지 택현(澤鉉, 1766-1830), 그리고 작은 할아버지 한현(漢鉉, 1768-1815) 때부터이다. 종현과 택현은 여사울(충남 예산군 신암면)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명례방(명동)의 김범우에게 교리를 배워 1784년경 한현과 함께 입교를 하였다. 그후 1788년경에 김 신부의 증조 할아버지 김진후(족보명은 運祚, 1735-1814)가 입교하자 전 가족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증조할아버지 김진후는 복음을 전해 받고 입교한 이후에는 관직을 버리고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김진후는 1791년 진산(충남 금산군)에서 제사 문제로 발생한 신해박해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충청도에 미치자 붙잡혀 홍주(홍성), 전주, 공주 등지의 옥문을 드나들었다. 신유박해(1801년)때는 김진후와 종현과 택현도 함께 체포되어 고문과 심문을 당하다 고통에 견디다 못한 김진후는 배교의 의사를 발하고 죽음을 면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배교를 뉘우치고 다시 잡힌다면 순교하리라는 굳은 결심을 하였습다. 얼마후 내포 지역에 다시 박해가 시작되어 1805년에 김진후는 거듭 잡혀 해미(충남 서산군) 감옥에 갇혔다. 그후 그곳에서 10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1814년 10월에 76세의 노구로 옥사하여 신앙의 진리에 대한 변함없는 신념과 절개를 보였다. 작은 할아버지 김한현(안드레아)은 아버지 김진후가 해미에서 옥사하기 전에 경상도 안동 우련밭으로 피신하여 신앙생활에 열중하다 배교자의 밀로 잡혀 투옥되었다가 1816년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 순교 하였다. 한편 이 곳 솔뫼에 남아 있던 김 신부의 할아버지 택현은 제봉(濟鳳, 1790-1821), 제인(濟麟, 1795-1839), 제철(濟哲, 1803-1855) 등 3형제를 낳았는데, 그중 둘째 아들 제인이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제준(濟俊)이다. 김제준은 장흥 고씨(高氏, 울술라)를 아내로 맞아 1821년에 김대건 신부를 솔뫼에서 낳았다. 본시 김대건 신부의 아명(兒名)은 재복(再福)이고 족보명은 지식(芝植)이다. 김대건 신부는 정해박해(1827년) 때 용인 골배마실로 피신할 때까지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부친 김제준(이냐시오)는 1839년 기해박해 때 국법을 어기고 그의 아들을 천주교 신부로 만들기 위해 해외로 내보냈다 하여 사학도로 몰려 투옥되었다가 고문에 못이겨 배교를 하였으나 다시 회개하고 서소문 밖에서 1839년 46세의 나이로 참수 순교하였다. 4. 김대건 신부 가정의 피난 이미 증조할아버지 김진후의 옥중 순교(1814년) 후에 포졸과 관리들의 수탈과 괴롭힘과 위협으로로 김 신부의 가세는 날로 기울고 피폐되었다. 언제 또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 불안해 하던 할아버지 김택현은 김 신부가 7살이 되던 1827년 지방박해인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를 거쳐 경기도 용인 땅인 한덕골로 피신하였다. 피신한지 3년이 지나 할아버지 김택현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1830년). 그후 가장이 된 김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은 골배마실(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산 속으로 들어가 신앙생활을 준비 하던 중 1836년에 조선 교회 사목을 위해 들어와서 서울 정하상 집에 머물고 있던 불란서인 모방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경기도 용인 산골에 많은 신자들이 살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5. 솔뫼에서 탄생하거나 관련된 천주교 순교자 및 성인 솔뫼에서 태어나시거나 사신 분들 중에 순교가 확실한 분들은 김진후(증조부), 한현(종조부), 제준(아버지), 데레사(한현의 딸), 손연욱(데레사의 남편), 제항(종조부 희현의 아들), 제교(종증조부 귀조의 손자), 김 대건 신부님, 진식 , 근식(숙부 제철의 아들들), 조씨(종조부 희현의 손자며느리) 등 11분이고, 그밖에도 순교하신 것으로 추정되는 분은 김택현(할아버지), 희현(막내 작은 할아버지), 선식(막내 작은 아버지 제철의 아들) 등 3분입니다. 이렇게 김 신부님의 가문은 시조 66世(중조 16世)부터 69世(중조 19世)까지 4대에 걸쳐 순교하셨습니다. 이 분들 중 현재까지 성인품에 오르신 분은 김제준(이냐시오)과 데레사,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 등 세분입니다. |